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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주말 산책] 봄빛에 취해황인숙 시인 | 제53호 | 20080315 입력

눈을 뜨니 방안 가득 햇살이 일렁였다. 노란빛이 촛불처럼 짙은 햇살이었다. 머리도 맑고 몸은 가뿐하고, 아직 오전이었다. 절호의 기회였다. 두어 달 전 청량리에 갔다가 집에 오는 길에 회기역에서 갈아탄 전철이 지하가 아니라 지상을, 그것도 강변을 따라 달리는 걸 알게 됐다. 용산에서 덕소까지 이어지는 노선이었다. 응봉역을 막 지나며 내려다본, 강물이 어루만지는 한적한 모래톱이 가슴 뭉클 새겨졌다. 언제 이 전철을 타고 덕소에 가리라. 거기서 강변을 걸어 되돌아오리라. 응봉동의 모래톱에도 내려가 거닐어 보리라. 그 소망을 실행할 날이었다.

동행이 있는 것도 좋지 않을까? 복원된 청계천에서 중랑천 지나 한강까지 서너 시간 원족을 종종 즐겼던 친구들을 모두 부를까 했지만, 평일 한낮에 갑자기 시간을 낼 수 없을 것이었다. 망설이던 참에 전화기가 울렸다. 원족 멤버 중 하나였다. 그는 프리랜서이니 시간이 날 테지만, 낮에는 움직이지 않는 족속이었다. “이 시간에 웬일?”로 시작된 통화 중에 간밤의 술자리 여파로 그의 컨디션이 역시 별로라는 걸 알게 됐다. 하지만 내가 강변을 달리는 전철 노선을 어찌나 설레게 묘사했던지 그가 같이 가겠다고 나섰다. 정작 어찌 될지 몰라 오래 걸을 생각을 밝히지 않았으니 그는 바람이나 쐬러 가는 줄로 알았을 것이다.

“햐, 덕소까지 가는구나! 교통카드에 얼마 안 남았는데 몇 만원 나오면 어떡하지?” 그의 걱정에 내가 이삼천원을 넘지 않을 거라고 안심시켰다. 덕소를 한 정거장 남겨둔 동네가 차창 밖으로 펼쳐졌다. 멀리 미루나무들이 부드러운 터치로 하늘 아래 선을 그리고 있었다. “이 동네 예쁘다! 우리 여기까지 걸어오자.” 그가 동의했다.

차비는 단돈 천삼백원이었다. 역 밖으로 나가자 서울 변두리 같은 여느 동네였다. 덕소가 이럴 줄이야. 우리는 일단 강으로 가기로 했다. 아파트 단지를 둘러싼 방음벽 아래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었다. 조금은 실망한 채 삭막한 거리를 돌고 찻길을 건너니 한강 근린공원이었다.

환상적 날씨였다. 햇살은 보드라웠고,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봄기운을 담뿍 싣고 있었다. 그 아래서 강물은 나른히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멀리 찻길이고 그 사이는 허허벌판이었다. 사십 분쯤 걸은 뒤에야 좀 가까이 식당인 듯한 건물이 보였다. 그 집은 문이 닫혀 있어 근처의 다른 식당에서 국밥을 한 그릇씩 먹었다. 인가에 왔으니 그만 걷자 할 줄 알았는데, 친구는 좀 더 걷자고 했다. 어찌나 좋던지! 새로 찻길을 내는 산비탈 미끄러운 황톳길을 지나니 웬 밥집들로 이뤄진 동네가 강 언덕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강물 위에 떠 있는 오리 떼를 볼 때마다 “어쩐지 오리탕집이 많더군!” 하며 우리는 낄낄거렸다. 키 큰 풀들이 지푸라기빛 군락을 이루고 있는 걸 볼 때면 갈대인지 부들인지 궁금했다. 강과 우리 사이에 바짝 마른 덩굴식물이 낡은 그물처럼, 먼지 타래처럼 끝없이 덮여 있었다. 여름이면 왕성한 생명력을 뽐내며 그 아래 관목들과 다른 풀들을 숨막히게 할 쐐기풀들이었다.

두 시간은 좋이 걸어 당도한 화장실에 친구가 들어간 새 그 옆 담에 붙은 금속판을 들여다보니 ‘왕숙천 3.6㎞ 산책로’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걸 들킬세라 멀찌감치 떨어져 그를 기다렸다(그러고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다음 얘기를 기대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