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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깃불과 칼국수

소년은 여름방학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방학 때는 소년의 농사일이 두 배로 늘어나고 소년의 동네에는 외갓집에 놀러온 도시아이들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촌놈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는 방학이기 때문입니다.

하얀 얼굴, 고운피부에 손질한 머리와 까만 운동화를 신은 남자아이는 소년이 보기에도 잘생겼고 공부도 훨씬 잘할 것 같았고 예쁜 머리끈을 꼽은 여자아이는 동화속 공주같이 예뻐 말을 붙일 자신이 없었습니다.

버짐이 퍼진 빡빡이 머리, 모기에 물려 성한 곳 없는 팔 다리 ,까맣게 타버린 온몸에 문신처럼 새겨진 바지와 윗도리의 선명한 자국들....

영락없는 촌놈이 자신인 것을 알게 되는 때가 이때였습니다.

시골의 농사일은 해뜨기 전 하루일의 대부분을 하고 점심을 먹은 뒤는 낮잠으로 한낮의 뙤약볕을 피한 후 해가 떨어질 때쯤 나머지를 해치우는 형태로 전형적인 아침형 입니다.

새벽안개가 하얗게 산허리를 감싸고 들판에 나지막이 물안개가 내려앉은 이른 아침에 광주리를 머리에 인 어머니와 지게 진 아버지, 누렁이 암소 와 소년 이렇게 한조의 농부들은 아침안개를 밝으며 콩밭을 메러 나섭니다.

어제같이 풀을 뽑았건만 밤새 커버린 잡초들은 이슬을 머금고 더욱 씩씩한 모습으로 콩밭을 덮고 있습니다.

줄자를 댄 듯 반듯한 콩 이랑은 어머니와 소년을 향해 푸른색 뱃살을 드러내고 줄지어 누워있습니다.

잡초를 뽑으려면 얼굴을 콩 속에 묻고 허리를 숙인 채 뿌리를 내린 놈은 호미로 파고 작은 놈은 손으로 뽑으면서 조금씩 나아갑니다.

숙인 얼굴에는 어느새 굵은 땀방울이 눈으로 들어오고 손과 발에는 흙으로 범벅이 되지만 정말 고통스러운 것은 끊어질듯 아픈 허리입니다.

한 두 걸음 뽑다가 앉아 쉬고를 반복 하다보면 어머님은 벌써 줄을 바꾸어 저 만치 나아가지만 소년은 첫 고랑의 초입에서 흙장난만 하고 있습니다.

소년이 콩밭 메는 일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밤새 찬 산에서 내려와 따뜻하고 푹신하고 마른 콩밭에 숨었든 뱀이 소년의 콩 메는 손에 놀라 숙인 얼굴 앞에서 온 몸을 뒤틀며 도망을 가면 그 자리에서 자지러지게 놀라 밭 가장자리에 앉아 울기도 했습니다.

어머님이 몇 고랑을 멜 동안 한 고랑 가지고 씨름을 하던 소년은 어머님이 아침 밥상에 올릴 푸성귀를 따서 광주리에 담으면 아침일이 끝나고 4인조 농부들은 왔던 길을 되밟아 집으로 향합니다.

불같은 뙤약볕이 수그러드는 늦은 오후쯤에 소년은 동네 형들과 동무들과 동구 밖 산으로 소에게 풀을 뜯어 먹이는 “소먹이”가는 것이 오후 일과입니다.

“소먹이”기는 일행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고 오랫동안 소먹이기를 하러다닌 형이 대장이 되어 그날그날의 행선지를 정하면 일행들은 그 뒤를 따릅니다.

제일 앞에는 대장이 서고 서열 순으로 그 뒤를 따르고 여자아이들은 맨 나중에 섭니다.

소 먹일 장소에 도착하여 산등성이에 소를 풀어놓으면 소들은 무리를 지어 풀을 뜯기 시작하면 그 산을 잘 아는 대장 형이 ‘멱’감기 좋은 장소로 일행들을 인솔합니다.

구릿빛 보다 까만 한 무리의 몸통들은 바위에서 계곡 물속으로 다이빙도 하고 한낮에 달구어진 바위에 드러누워 뭉게구름을 배경삼아 동요를 목청껏 부르면서 자연이 중 최고의 찜질을 즐기다 더우면 다시 계곡 물속으로 뛰어들기를 數 차례…….

금방 배가 고파옵니다.

어머니는 늘 보리가 태반인 점심밥을 광주리에 담아 마루 위 “시렁”(긴 나뭇가지 2개를 처마 끝에 매달아 물건들을 올려놓는 곳으로 바람이 잘 통해 음식물이 쉬지 않음)) 에다 담아두었다 찬물에 말아 먹는 식으로 점심밥을 차리곤 했습니다.

멱 감기가 끝날 때쯤 대장 형이 말합니다.

“야 오늘은 무얼 해 먹을까?”

그날그날의 메뉴는 대장 형과 동무들이 그날의 행선지에서 제일 많이 있는 곡식 중에서 고릅니다.

밀 서리는 밀을 뽑는 조와 밀을 굽는 조로 나누어 적당히 구운 밀을 손바닥으로 비비면 고소한 통밀구이가 되고 보리서리는 보리를 뽑기는 쉽지만 굽기가 어려워 덜 굽거나 더 구우면 보리가 잘 까지질 않아서 애를 먹고 호박 서리는 콩이 필요해 반드시 콩서리를 해야 하고 단맛을 낼 ‘사카린’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로 밀 서리를 합니다.

가끔씩은 멀리 원정을 나갈 때가있는데 주로 과일서리를 할 때였습니다.

그때는 여자아이들은 남겨두고 이 십리쯤을 뛰어야 하기 때문에 발 빠른 고학년 남자아이들 중심으로 원정대를 꾸려 복숭아, 사과 서리를 나섭니다.

복숭아밭은 주인이 할아버지고 밭이 산을 끼고 있어 숨기도 좋고 낮엔 일하는 사람이 없어 쉽게 딸 수가 있었습니다.

사과밭은 멀기도 하지만 큰 개들이 사과밭을 지키고 주위가 논밭으로 접근하기도 어렵고 이맘때는 사과 따는 아줌마들이 있어 일행 중 가장 몸이 빠른 두어 명만 사과 따러 들어갑니다.

제철인 수박과 참외밭은 빤히 보이는 곳에 많지만 한 동네라 잡히면 부모님께 혼날 것이 무섭고 다들 한 번씩은 혼난 적이 있어 마음은 굴뚝같지만 엄두가 나질 않아 망설인 적이 많았습니다.

‘멱’ 도감고 서리로 허기를 채우고 나면 소먹이기와 함께 해야 할 일을 위해 각자 ‘꼴’(소 먹일 풀)을 배러 흩어집니다.

소가 좋아할 꼴을 망태기 배가 터지도록 채우고 나면 해는 어느덧 서산에 걸터앉고 소를 찾아나서는 소년의 등 뒤로 거인만큼 큰 키의 소년을 만들어줍니다.

온 산을 누비며 마음껏 풀을 뜯은 누렁이는 돌아오는 길에 개울물로 목까지 축이고 나면 누렁이와 송아지의 양쪽 배는 터질듯이 부른 배를 뒤뚱이며 어둠이 깔리는 동네길 을 밟으며 소년에 이끌려 집으로 옵니다.

늘 수건을 둘러쓴 어머니는 올여름에 추수한 밀가루로 칼 국수반죽을 하시고 뒷마당 한켠에서 늙은 호박 틈에서 딴 애기 호박과 한 움큼의 호박잎으로 저녁상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외양간 맞은편에 소똥과 볏짚과 흙을 버무려 올 겨울 논밭에 뿌릴 퇴비를 만드는 작은 거름 봉우리 옆에 불을 피우는 아버지의 모습도 늘 이때쯤이었습니다.

하얀 모깃불 연기가 온 집안에 낮게 깔리고 별들이 하나씩 고개를 내밀 때 소년과 어머니 그리고 땀 냄새로 온몸이 찌든 아버지, 이렇게 세 식구는 마당에 놓인 “살평상”에서 칼국수 저녁을 시작합니다.

늘 그랬지만 소년에겐 어머니의 칼국수가 입에 맞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칼국수는 거무튀튀했고 가락은 거칠고 면을 젓가락에 걸면 금세 끊어져 숟가락으로 퍼먹는 것이 오히려 편했습니다.

어머니의 칼국수에는 늘 호박잎이 들어가 있어 까칠 거리는 호박잎 때문에 칼국수가 아니라 ‘풀’ 같은 느낌이 들어 먹을 때 마다 자신이 “누렁이”가 된 기분이라 도저히 먹을 수 없었습니다.

칼국수 면 이 검고 거칠고 찰기가 없는 것은 어머니가 반죽을 할 줄 모른다고 생각했고 칼국수에 호박잎을 넣은 것은 칼국수를 끓일 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칼국수를 끓이는 날이면 “밥” 먹을 요량으로 어머니 칼국수는 맛없어 못 먹겠다고 트집을 부리고 그때마다 어머니는 한마디 쏘아붙이고 상을 빼버립니다.

“배고프면 묵는다!”

“그때까지 굶어라”

“대구로 유학간 형과 누나들은 쌀밥 먹을 텐데 왜 나만 맨 날 보리밥에 푹 퍼진 칼국수를 먹어야 하지?”

“난 정말 다리 밑에서 주워온 자식인가?”

‘살평상’에 걸터앉아 엉킨 생각들을 맞추는 소년의 머리는 복잡해지고 무거운 마음으로 팔을 궤고 누우니 수많은 별들이 쏟아질듯 반짝거립니다.

깜깜한 밤하늘에 별똥별 꼬리가 긴 그림을 그리며 떨어지고 대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 동구 밖 들판에선 개구리 합창대회가 열리고 가끔씩 들리는 산비둘기 울음소리에 잠이 들 때쯤........  “막내야 오늘 힘들었제”

“배 안고프나?”

일을 마친 어머니가 무릎에 소년의 머리를 당기며 나지막이 말씀하셨습니다.

소년은 속으로 생각합니다.

배고프다고 말하면 엄마한테 지는 거고 그러면 챙겨주지 않을 거고.......

“점심때 너 줄라꼬 남~가 둔 밥이다.”

‘마~이 묵고 공부 잘 해라~이“

몇 십 년이 흐른 후 소년의 머리에서 흰 머리카락을 뽑을 수 없을 만큼 많아졌을 때 알았습니다.

어머니 칼국수가 검고 거칠었든 것은 밀을 곱게 빻지 못한 시골 방앗간 때문이고 칼국수에 호박잎은 자식들 유학비 마련에 더 넣을게 없었기 때문이란 걸........

호박잎 칼국수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어머님 표 칼국수였고 숟가락으로 떠먹은 칼국수용 밀가루는 유기농 우리밀로 빻은 친환경 아버님 표 밀이었습니다.

철없든 소년은 이제 중년을 넘어 장년의 세월을 가면서 아직도 철들지 않는 소년이 되어 어머니의 칼국수와 아버지의 모깃불을 그리워하며 한 모금의 담배 연기에 지난세월을 태워봅니다.

저기 가을이 오네요…….

귀뚜라미 등에 업혀 뭉게구름을 타고 오는 파란 가을을 마중하러 갑니다.

철없는 늙은 소년이…….